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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글.

봄 이야기

bonjourmint 2017. 4. 2. 23:20


  나는, 습하지는 않지만 물기 어린 공기의 냄새를 좋아한다. 비가 내리고 촉촉이 젖어 저마다의 싱그러움을 내뿜는 그 느낌이 나는 좋다. 모든 것에는 그만의 냄새가 있다. 불린 쌀로 정성 들여 뜸을 들인 밥 짓는 냄새, 파도처럼 밀려드는 시원한 바다 냄새, 은은히 방 안에 퍼지는 작약 냄새, 그리고 그의 옆에 있으면 문득 다가오는 그의 냄새……. 하물며 내가 쓰는 물건들에도 내 손때 묻은 냄새가 날 터이다. 비가 오면 후각이 예민해지는 것인지, 비가 오는 날이면 그 특유의 냄새들이 나에게 물밀듯이 떠밀려 온다. 물을 머금은 공기를 타고 오는 것일까, 비가 오면 나는 저마다의 향에 취한다. 봄은 그렇게 찾아왔다.


  봄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봄은, 비와 함께 왔다. 시원한 밤공기도 같이. 어느덧 익숙해진 텁텁함 탓에 맑은 하늘 맑은 공기를 만끽하는 것은 사치가 된 듯하다. 하늘은 뿌연 무채색으로 가득하다. 따뜻한 날씨를 맞으며 뛰놀아야 할 아이들은 마스크를 끼고 집으로 발을 옮긴다. 미세먼지 경보란다. 먼지는 모든 것들을 뒤덮었다. 산을 덮고 땅을 덮었다. 우리의 집과 거리에, 그리고 우리의 피부에 먼지가 내려앉았다. 존재의 향은 두꺼운 먼지 층에 숨을 죽이고만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비를 기다렸다. 아니, 갈망했다고 하는 편이 옳다. 비가 내려 이 먼지를 씻어주기를, 저마다의 본향(本香)이 살아 숨쉬기를 간절히 바랐다.


  비는 모든 것을 씻어냈다. 먼저 거무튀튀한 먼지들을 닦았다. 어느 곳에라도 쌓여 숨조차 쉬지 못하게 목을 옥죄는 대기를 쓸었다. 비는 두꺼운 먼지를 벗기고, 아직 남아있는 겨울의 한기도 벗기었다. 겨우내 잔뜩 움츠러든 이 세상에 활력을 심었다. 그렇게 몇 겹을 벗겨내자 진정한 속살은 잔뜩 물기를 머금을 수 있었다. 얼마 만에 하는 목욕인지도 모른다. 그는 참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긴 계절을 견뎌와야 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 하는 물은, 이 땅에 다시 생명을 안겨 주었다. 새로이 시작하는 계절은 그 준비를 모두 마쳤다. 구석구석 깨끗이 씻으면서 다시 설 힘을 얻었다.


  나는 우산도 없이 봄비를 맞았다. 그전부터 봄비가 올 것이라고 예보를 했지만 나는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비를 맞을 작정이었다. 지난날 내가 가지고 온 해묵은 먼지들을 털어버리려고, 멈춘 듯한 시간을 딛고 다시 출발하려고, 나는 비를 맞았다. 옷에 천천히 비가 스몄다. 많은 양의 비는 아니었지만 나는 비를 즐겼다. 내게서 봄 향기가 나기를 소망하며 빗속을 걸었다. 두근거리는 풀냄새와 아른거리는 흙냄새,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기 머금은 공기 냄새……. 나는 온 신경을 봄을 만끽하는 데 집중하였다. 나는 푸른 봄을 보고 봄을 맞으며 봄을 맡았다. 비는 나를 계속 맞혔다. 그리고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밤에 달을 보았다. 누구는 손톱달, 누구는 눈썹달이라 한다. 달의 왼편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비를 흩뿌린 하늘은 어느 때보다 맑고 깊은 마음을 열었다. 나는 여전히 촉촉한 밤공기를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하늘도 봄이 오기를 원하였으리라. 그렇기에 비를 뿌린 뒤 가장 고운 자태로 봄을 맞이하는 것이리라. 며칠이 지나고 나면 봄의 제전도 그 막을 내려 다시 답답한 터널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먼지는 다시 들붙고 다시 비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잠깐의 시간이라도 봄을 즐기었다. 촉촉이 젖은 봄을 느끼며 나를 새로이 하였다. 새 옷으로 갈아입었으니 이제 새로이 걸을 차례이다. 나는 올해도 예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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