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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다./일상.

비빔의 민족

bonjourmint 2016. 9. 2. 23:19


  며칠 전 점심은 비빔냉면이었다. 쫄깃한 메밀 면발에 매콤한 양념이 아주 일품이었다. 누구나 '비빔냉면'하면 떠올릴 만한 그런 맛이었다. 그렇다고 그 맛이 천편일률적이지는 않았다. 보편적이기는 했어도 천편일률적이지는 않다. 그것이 그 말 같지만서도 사실은 다른 맛이다. 보편적이긴 해도 그 음식만의 특유의 맛이 살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비빔냉면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또 얼마 전 저녁은 비빔밥이었다. 아삭한 열무김치에 오이와 당근, 무채, 부추를 넣고, 계란 프라이 한 쪽, 거기에 고추장까지.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 빠지면 섭섭한 참기름이다. 참기름을 한 숟갈 빙 둘러주면 맛있는 비빔밥을 위한 준비가 다 됐다.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면서 재료들을 골고루 섞어주면 끝. 열무부추비빔밥 대령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또 비볐다. 비빔밥이나, 비빔면이 아니었지만 비볐다. 흰쌀밥에 열무김치를 얹고 돼지고기볶음을 올린 후 상추를 뜯어서 올리고 쌈장 약간에 참기름을 해서 비비고야 말았다. 나는 드디어 비빔에 중독된 것일까. 비빔의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만 것일까.


  사실 우리는 비빔의 민족이다. 백의민족이기도 하고 배달의 민족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비빔의 민족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우리는 비벼야 행복하다. 그리고 비벼야 만족한다. 얼마 전에 먹은 만두 이름도 '비비고'였다. 그 만두는 쫄깃쫄깃하고 속이 알찬 게 딱 냉동식품이었다. 냉동식품도 그 나름의 맛이 있다. 냉동식품으로 조그만 행복을 찾는 국군 장병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비비고 하나면 여럿이서 행복하게 간식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아쉽게도 그 만두가 비빔만두는 아니었다. 그래도 한국인들이 얼마나 비빔을 좋아하면 상품 이름을 '비비고'로 지을까. 볶고, 지지고, 삶고, 버무리고, 데치고, 굽고, 튀기고 등 먹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도 왜 하필 '비비고'였을까. 그 이유는 우리가 비빔의 민족인 데에 있는 듯싶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눈에 띄게 혹은 눈치채지 못 하게 수많은 비빔을 행하고 있다. 어떻게 비비든 결국엔 모든 것은 비빔으로 통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일상 속 비빔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빙수야 팥빙수야 사랑해 사랑해. 가수 윤종신의 대표곡 중 하나인 '팥빙수', 올 무더운 여름을 견뎌내게 한 아주 감사한 음식이었다. 우리 집 앞 카페는 빙수를 참 맛있게 잘한다. 모 프랜차이즈 빙수 가게처럼 눈꽃얼음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빙수가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 비밀은 바로 오뚜기 프레스코 쏘쓰, 우리 시어머니 쩡말 좋아요. 크리스티나 성대모사는 농담이고, 팥도 푸짐하게 올리고 갖은 고명들도 수북이 얹어서 그런지 맛이 있다. 어떤 빙수집의 빙수는 비비지 않고 위에서부터 떠서 먹으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 빙수는 비벼야 제맛 아니겠는가. 빙수 한 그릇을 쓱싹 비벼서 한 숟갈 크게 퍼서 입 안에 넣으면 머리가 아프다. 너무 크게 떴다. 적당히 퍼서 냠하고 물으면 달달한 그 맛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이처럼 우리는 옛날부터 비벼 먹는 것을 좋아했다. 밥이랑 국을 따로 먹다가 국에 밥을 말아 먹으니까 맛이 괜찮은지 '국밥'이라는 음식이 따로 떨어져 나왔다. 심지어 국밥마저도 말아져 나오는 것과 밥과 국이 따로 나오는 따로국밥이 있을 정도로 비벼 먹는 것은 우리 민족이 최고다. 김치도 김장할 때 김칫소를 배추나 무에 버무리지 않는가. 이것들이 다 비빔이다, 비빔.


  우리는 먹을 때만 비비는 것도 아니다. 아주 눈코 뜰 새 없이 우리는 쉬지 않고 비비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눈을 비빈다. 일단 한 번 비빔이 나왔다. 날이 좀 춥다 싶으면 손도 비비고 팔도 비빈다. 머리를 감을 때에는 머리도 비빈다. 온몸에 비누 칠을 하기 위해서 몸통에 비누도 비비고, 아주 비비느라 난리가 났다. 그나저나 머리카락을 면으로 하고 샴푸를 양념이라고 한다면 샴푸질을 한 머리는 비빔면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무인도에서 혼자 낙오됐다면, 그런데 먹을 게 없다면 어떻게든 머리를 비벼서 비빔면이라고 생각하고 먹어보자. 곧 죽겠지. 솔직히 이 정도면 비벼볼 만하다. ㅇㅈ? 흔히 '휴먼급식체'라고 부르는 말투이지만, 두 대상을 비교할 때 특히 그 두 대상이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일 때 우리는 '비벼볼 만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제는 말에서까지 비비려고 한다. 언제까지 그렇게 비빌 건지 원. 과연 비빔의 민족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비빔의 내력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간혹가다가 비빔의 달인이 나오기는 한다. 옆 나라에 아사다 마오가 그렇다. 2010년 4대륙선수권대회에서 '한바탕 전주, 세계를 비빈다'라는 전주시 슬로건 앞에서 트리플 악셀을 열심히 비벼댔다. 아사다 마오는 그 갈린 얼음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아사다 마오는 카키코오리를 그 비빈 얼음으로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카키코오리는 일본식 빙수인데, 얼음을 곱게 갈아서 그 위에 시럽을 뿌려 먹는 음식이다. 아사다 마오가 카키코오리를 참으로도 좋아했나 보다. 매 대회 때마다 악셀도 비비고, 러츠도 비비고, 플립, 룹, 살코, 토룹 안 비비는 게 없다. 그렇게 비빔의 장인이 되어서 카키코오리를 엄청 만들어 먹으면 무엇 하나. 우리 비빔의 민족의 기상을 타고난 김연아 선수는, 빙판 위에서 비비지 않고도 정정당당하게 교과서적인 점프와 차원이 다른 표현력으로 세계인들의 극찬을 받았다. 우리 몸속에 흐르는 비빔의 피는 그 수없이 단련된 비빔의 장인도 거뜬히 무찌르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비빔의 민족으로 살아왔다. 결국 비빔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비비다'라는 동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러 가지 뜻이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뜻은 '두 물체를 맞대어 문지르다'이지만, '재료를 버무리다',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다', '아부하다',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다' 등 정말 다양한 의미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의미는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다'와 '재료를 버무리다'의 두 가지 의미이다. 갖은 재료를 비벼 비빔밥이라는 음식이 새롭게 탄생하면, 그 맛도 재료 각각의 맛이 온전히 살아있다기보다는 하나 되어 어우러져 새로운 맛이 된다. 우리의 시대는 혼란과 갈등의 시대이다. 이런저런 고민 걱정들, 여러 갈등이 많지만 우리도 비비면서 살자. 서로 비벼주면서 어우러져 그렇게 살면, 하나 되어 화합을 이루어내면 조금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오지 않을까. 비빔의 민족답게 비비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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